
약체라고 무시했다가 큰코다칠 뻔한 경험, 혹시 없으신가요? 저는 이번 WBC에서 그 가능성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3월 5일 호주와 대만의 개막전에서 WBSC 랭킹 2위 대만이 11위 호주에게 0대9로 완패했을 때, 단기전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체코를 상대로 11대4 승리를 거뒀어도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특히 투수진 컨디션이 걱정스러운 상황에서 일본전을 앞두고 있으니 말입니다.
만루홈런이 만든 완벽한 시나리오
1회초 문보경의 만루홈런은 단순히 4점을 얻은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저는 경기를 보면서 "이게 진짜 승부처구나" 싶었습니다. 만루 상황에서 병살타나 범타가 나왔다면 체코 투수진의 자신감이 살아나고, 우리 타선은 위축됐을 겁니다. 하지만 문보경은 타구 속도(Exit Velocity) 111마일을 기록하며 좌중간 담장을 넘겼습니다. 여기서 Exit Velocity란 타자가 친 공이 배트를 떠나는 순간의 속도를 의미하는데, 이날 양 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빠른 타구였습니다.
이 홈런으로 한국은 WBC 통산 네 번째 만루홈런을 기록했고, 단일 국가 기준 최다 만루홈런 보유국이 됐습니다. 이진영, 김하성, 박건우에 이어 문보경까지 이름을 올린 셈입니다(출처: 월드베이스볼클래식). 특히 이진영 코치가 현재 타격코치로 벤치에 있다는 점에서 묘한 인연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직접 경기를 보면서 놀란 건 타자들의 변화구 대응 능력이었습니다. 문보경의 만루홈런도 변화구였고, 셰이 위트컴의 연타석 홈런은 각각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맞춘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직구 타이밍만 맞춰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공을 끝까지 보고 판단한 결과였다는 겁니다. 이는 대표팀 타자들이 단기전에서 요구되는 선구안(Plate Discipline)을 제대로 갖췄다는 증거입니다. 선구안이란 타자가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별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공을 골라 치는 능력을 뜻합니다.
하위 타선 폭발과 숨은 우려 요소
5번 문보경과 6번 위트컴의 조합이 이날 경기를 사실상 결정지었습니다. 두 선수가 합쳐서 4안타 4득점 8타점을 기록했으니, 체코 입장에서는 이 두 타자만으로도 버거웠을 겁니다. 저는 위트컴이 연습경기에서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여 걱정했는데, 막상 본 경기에서는 트리플A 홈런왕 출신답게 장타력을 제대로 발휘했습니다. 특히 체코가 3점 홈런으로 추격한 직후 위트컴이 곧바로 3점 홈런으로 받아쳐 분위기를 다시 가져온 장면은 단기전에서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보여줬습니다.
상위 타선도 제 몫을 했습니다. 이정후는 멀티히트로 안정감을 보여줬고, 박동원과 김주원도 좋은 타격 내용을 이어갔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혜성의 타격이었습니다. 이날 무안타에 그쳤는데, 타이밍이 계속 빨라서 땅볼만 양산했습니다. 대표팀 합류 직전까지 10경기에서 좋은 타격감을 보였던 선수라 하루 휴식 후 조정이 가능하리라 봅니다만, 일본전을 앞두고는 신경 쓰이는 대목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는데, 체코의 타선이 생각보다 날카로웠습니다. 체코는 9개 안타를 생산하며 한국 마운드를 꽤 흔들어놨습니다. 2023년 대회 때 체코 선수 중 상당수가 다른 직업과 병행하며 야구를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이번 대회를 보니 전력이 확실히 상승한 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호주, 대만, 일본을 상대로도 충분히 이변을 만들 수 있는 팀이라고 생각합니다.
투수진 컨디션과 일본전 변수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은 역시 투수진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타선은 대회 전부터 컨디션이 올라온 반면, 투수진은 구속(球速)이 시즌 때만큼 나오지 않았습니다. 구속이란 투수가 던진 공의 속도를 의미하는데, 보통 시즌 초인 3월에는 투수들의 어깨와 팔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 구속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날 한국은 7명의 투수를 사용했는데, 특히 젊은 불펜 투수들이 공인구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었습니다.
다행히 볼넷(Four Ball) 허용 개수는 3개로 비교적 적었습니다. 볼넷이란 투수가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공을 4개 던져 타자를 1루로 내보내는 것을 뜻하는데, WBC는 자동 볼스트라이크 판정 시스템(ABS)이 아닌 사람 심판이 판정하기 때문에 볼넷 관리가 더 중요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안타 허용과 추격 홈런을 맞은 점은 일본전을 앞두고 부담 요소입니다.
다음 경기는 3월 8일 일본전입니다. 도쿄돔에서 열리는 이 경기는 관중 대부분이 일본을 응원할 것이고, 경기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대표팀의 현실적인 목표는 일본전 승리보다는 조별리그 통과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출처: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투수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모든 경기에 올인할 수는 없으니, 전략적인 투수 운용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번 체코전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본 부분이 이정후의 리더십이었습니다. 홈런이 터질 때마다 한국계 선수들과 함께 기뻐하고, 팀 전체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장으로서 팀 케미스트리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경기력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첫 경기 패배 징크스를 벗어났고, 득실차 +7이라는 좋은 출발을 했지만, 일본전은 또 다른 차원의 경기가 될 겁니다. 하루 휴식을 통해 투수진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김혜성 같은 선수들의 타이밍을 조정하는 것이 다음 승리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